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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과의 수교, 그리고 베트남 전쟁

Views : 51 2019-08-14 01:59
베트남게시판 127435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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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베트남국으로 나뉘었다. 베트남국은 응오딘지엠의 정변으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진다.

베트남 공화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과 프랑스 제4공화국에 의해 자유 진영에 편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은 1956년에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남베트남과 자유 진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고엽제 피행 등 후유증을 안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여러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였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요청 등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고 1965년 의무중대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되어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으며, 고엽제(2만여 명의 피해) 및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밀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남한)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2005년 8월 26일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한편 이대용 공사(公使)는 사이공 함락 직전 먼저 탈출한 대사를 대신해 국군 장병과 건설인력의 안전한 철수 귀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애쓰다가 탈출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공산군에 붙들려 투옥된 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거부하며 5년간 복역하다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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